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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베이커스필드) 현충일 추모는 코로나 우려에도 그치지 않았다!
작성자 김수현 작성일 202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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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추모는 코로나바이러스 우려에도 멈추지 않았다!

 

2020. 5. 25. STEVEN MAYER(스티븐 메이어)

*참고 : 미국의 현충일(전몰장병 추모일)은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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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08pixel, 세로 428pixel

 

델턴 캐럴은 1953년 3월 28일 한국전에서 사망한 동생 오브리 캐럴의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현충일 기념행사가 취소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캐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묘지를 방문하는 것은 반겼다.

 

2020년 현충일은 COVID-19 의 해와는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시하거나, 방치되거나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현충일 행사가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여전히 군복을 입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을 방문했다.

 

그간 현충일 퍼레이드를 준비했던 한 재향군인 단체는 추모퍼레이드에 가는 것 대신 추모퍼레이드 참가자들에게 가는 것으로 기획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재향군인 단체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전쟁의 포염 속에서 싸우다 전사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베이커스필드 시민 델튼 캐럴(74세)은 동생 오브리 캐럴에 대해 "동생은 1953년 3월 28일 한국전에서 전사했으며은성훈장과 그에 상응하는 한국에서 준 메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캐럴은 그의 아내 Rheba와 함께 Greenlawn 공동묘지에 있었고 그곳엔 많은 가족들이 그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가 동생을 찾기 위해 길고 우거진 잔디밭을 걸어나갔을 때 그의 발걸음은 목적이 있었고, 한 움큼의 붉은 글라디올라와 카네이션 꽃다발을 들고 다녔다.

 

캐럴은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내 동생은 아들을 전혀 키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생 무덤을 찾았을 때, 캐롤은 글라디올라 다발을 추모석 가장자리에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가지고 온카네이션을 나누어 다른 참전용사들의 묘지에 놓았는데, 그 묘지는 현충일을 위해 심어진 작은 미국 국기를 제외하고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무명군인의 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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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일찍, 긴 행렬의 차와 트럭을 탄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콜럼버스 에스테이트 은퇴자 거주지를 행진했다. 자원봉사자들은 경적을 울리며 손을 흔들었지만, 노인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이동하는 퍼레이드는 베이커스필드에 있는 은퇴자 4개 지역까지 이어졌다.

 

컨 카운티 참전용사를 기리는 비영리 자원봉사단체인 Honor Flight Kern County(아너 플라이트 컨 카운티) 설립자인 릴리 마쉬와 함께 행사를 기획한 마크 샌달은 "이번 행사는 현충일을 기리는 안전한 방법으로 기획했다" 고 말했다.

 

그는 "릴리와 내가 이 퍼레이드를 기획했고 우리는 매년 현충일 전 주 금요일에 이것을 전통적으로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콜럼버스 에스테이트에 거주하는 토니 그리피스(87세)는 퍼레이드가 시설 내 원형 진입로로 천천히 이동하자 박수를 쳤다.

 

"오늘은 정말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때때로 무작위 복권과 같은 전쟁에서 잃은 오랜 사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비행기는 태평양에서 추락했다"고 그녀는 기억했다. "그들은 결코 그를 찾지 못했어요."

 

베이커스필드 시민 에드워드 아자르는 매년 현충일에 그와 이름이 같은 삼촌 에드워드 아자르를 기린다. 그는 1942년 11월 13일 과달카날 전투에서 스테레트호에 승선하던 중 전사했다.

 

올해 하자드는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삼촌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정했다.

 

아자르는 자신의 게시물에 "나는 그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보섬 제3차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한 해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위대한 전투에 참여한 결과로 구축함인 USS Sterett 함은 해군-해양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표창문에는 스테레트호의 승조원들이 근접 거리에서 일본 선박 3척을 성공적으로 침몰시킨 34분간의 격전이 묘사되어 있다.“

 

"그 후 적의 순양함을 무수히 명중시켜 사거리를 3,000야드까지 폐쇄하고 어뢰를 발사해서 두 차례 큰 폭발을 일으키며 적군의 전함을 침몰시켰다.

 

적 구축함이 선체 우측 1000야드 떨어진 곳에서 목격되자 어뢰 2발과 5인치 인양기 2발을 폭격하여 적 함정이 포문을 열기도 전에 침몰시켰다."

 

표창은 선원들의 용맹함과 비상한 활약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으로 계속되며 제임스 포레스탈 해군 장관이 서명했다.

 

아자르는 "우리 삼촌은 자유 수호를 위해 그 전투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끔찍한 밤에 목숨을 바친 모든 선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 말했다.

 

삼촌이 묻힌 곳을 묻자 아자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통보받은 전보 원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전보에는 '전투상황으로 인해 사체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2000년대 초 나는 그날 밤 배에 같이 타고 있던 승조원 중 한 명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삼촌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할 이야기가 있었다." 아자르가 기억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전사자들의 수장을 준비하면서 사체 포대를 꿰맨 승조원 중 하나였다. 그가 나에게 그 당시 전투와 시체 운반용 포대를 꿰매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울 때 나도 따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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