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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K-방역,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15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은 전통 시대에도 창궐했다. 철저한 방역으로 백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국정 업무다. 조선시대 유행한 전염병과 그 방역 활동을 소개한다. 글.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역질로 많은 승려가 목숨을 잃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의 터  ⓒ 


조선시대에도 유행한 전염병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역(癘疫), 역병(疫病), 역질(疫疾) 그리고 악병(惡病), 온역(溫疫), 천연두(天然痘), 괴질(怪疾) 등 전염병을 의미하는 용어를 검색해보면 모두 2,000건이 넘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실록에는 역병을 가리키는 용어가 65종 정도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여역(癘疫)이라는 용어가 966건으로 가장 많이 나온다. 두역(痘疫), 학질(瘧疾), 홍역(紅疫), 시병(時病), 염병(染病), 악병, 온역이라는 용어도 자주 등장한다. 전염병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93년 3월 태조가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양주 회암사에 역질이 유행한 것이다. 회암사에 역질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어 많은 승려가 희생되었고, 왕사(王師) 자초(自超)는 거처를 급히 광명사로 옮겼다. <숙종실록>에는 1719년(숙종 45) 1월 2일 “충청도에서는 각 고을마다 염병(染病)을 한창 앓고 있는 백성이 1,643명이고 사망이 240명, 온 집안이 몰사(沒死)한 경우가 4호(戶)였다. 경기도에서는 한창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3,111명이고, 사망이 869명이었다”는 기록에서는 전국적인 전염병 피해 상황을 알 수 있다. 전염병은 전쟁보다 무서운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실록 이외에도 오희문의 <쇄미록>이나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 일기 자료, 이황이 아들에게 쓴 편지 등에도 본인이나 지인, 가족 등이 직접 전염병을 경험한 기록이 나타나 전염병이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가장 공포스러운 전염병은 천연두와 콜레라 조선시대 주된 전염병은 학질, 두창(천연두),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콜레라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백성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마마’라고도 부른 두창과 ‘호랑이가 몸을 찢는 것처럼 아픈 병’이라는 뜻으로 ‘호열자(虎裂刺)’라 부른 콜레라였다. 두창을 두려워한 이유는 사망률이 높았을 뿐 아니라 겨우 살아나더라도 후유증으로 얼굴이 얽어 심한 흉터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회적 격리는 기본, 천도(遷都)까지 논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를 격리하고, 왕도 궁궐의 거처를 옮기는 등 당시에도 사회적 격리가 이루어졌다. 세종은 1434년(세종 16) 6월 전염병이 유행하자 예조에 명해 “널리 의방(醫方)을 초(抄)하여 내려보내서 서울과 지방의 집집마다 주지시키도록 하여, 정성을 다하여 구료하여, 나의 긍휼(矜恤)하는 뜻에 맞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세종은 환자의 시신을 전문적으로 매장하는 매골승(埋骨僧)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1451년(문종 1) 9월 문종은 친히 악병(惡病, 현재의 뇌수막염 계통의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논의를 한 후 도승지 이계전에게 내렸다. 현재로 보면 대통령 특별담화문을 비서실장에게 발표하도록 한 방식이다. 1448년 10월부터 황해도에서 유행한 악병이 경기도 교하와 원평 등지까지 전파되어 그 세력이 커지자 경기와 가까운 서울까지 전파된다면 큰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문종은 전염병이 확산하면 천도(遷都)를 논의할 수 있다면서 이 병을 치료하는 방안을 서둘러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최종적으로는 효과를 본 벽사약(辟邪藥, 전염병 치료제) 보급, 백성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수륙재(水陸齋, 불교식 제례)를 임시 허용하는 것 등이 결정되었다.

홍역과 두창 퇴치를 위한 이론을 정리한 <마과회통>을 저술한 다산 정약용의 동상  ⓒ 


방역 전문 의료기관과 명의 탄생 의료기관을 통한 방역도 실시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의료기관인 내의원(內醫院)을 비롯해 관리들의 치료와 약재 공급을 담당한 전의감(典醫監), 일반 백성을 치료하는 혜민서(惠民署), 이외에 혜민서와 함께 빈민 구제를 담당하다가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격리하는 시설로 사용한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활인서는 동소문과 서소문 밖에 설치해 도성 내 전염병 전파를 막았다. 백성을 치료하는 기관으로 조선 초기에 설치한 제생원(濟生院)도 있었다. 내의원은 약방(藥房)이라고도 했는데, 궁궐 안에 두었다. 내의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에는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造化御藥)’이라고 해 ‘왕의 몸을 보호하고 왕의 약을 잘 만든다’는 뜻을 담은 영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다. 전염병을 치료하는 명의(名醫)도 탄생했다. 허준(許浚)은 광해군이 왕자로 있던 시절에 그의 두창을 치료해 명의 반열에 섰으며, 숙종 때의 어의 유상(柳瑺)은 왕의 두창을 치료한 공으로 종 2품직까지 올랐다. 정약용(丁若鏞)은 홍역과 두창 퇴치를 위한 이론을 정리한 <마과회통>을 저술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지석영(池錫永)이 우두법을 시행해 두창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85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건립해 근대화된 의료시설을 통해 방역 대책을 세워나갔다. 전염병의 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을 벗어났을 때 “홍역을 치르다”, “학을 뗐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예이, 염병할 놈”은 전통 시대에 가장 심한 욕이었다. 체계적인 방역 시스템과 백신의 접종,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적극적으로 실천해 “코로나를 떼다”라는 말이 유행어로 남을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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